5卷3冊 : 四周雙邊 半郭 19.2 x14.7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向黑魚尾 ; 31.0 x 20.2 cm.
조선 중기 훈련원주부, 보성군수, 경주영장 등을 역임한 무신 조형도의 시문집이다. 자칭 청계도사(淸溪道士)라 일컬었다. 생육신조려(趙旅)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조지(趙址)이다. 큰아버지 조우(趙堣)에게입양되었다. 부인은 부윤 오운(吳澐)의 딸이다. 1583(선조 16)년지 민추(閔樞)에게 수학했다. 1587년 정구(鄭逑)를사사한 뒤 3년 간 향시에 연이어 장원하였다. 1592년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왕산성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이러한 공으로 특별히 훈련원주부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과를 지원해 1594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선전관겸비국랑(宣傳官兼備局郞)에임명되고 이어 통정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청하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경산현령이 되었다. 1606년 고성현령에 임명되었다. 1608년 의병을 모집하는 임시직인소모장(召募將)으로 창원에 차송되었다.
1609(광해군1)년 영중군 김명윤(金明胤)의 참소로 진주옥에수감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첨지중추부사 정광적(鄭光績) 등의 변호로 풀려났다. 1614년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싫어하여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17년 순찰사 윤훤(尹暄)이 수군 분담을 개청하는 일로 불러 중군에 들었다. 이때 토포사를겸행하여 영천감옥에서 탈옥한 죄수 이경기(李景祺) 일당 을붙잡는 데 공을 세웠다. 1622년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이해에 청나라가 침입하려 하자 순변사 류비(柳斐)의 종사관이되었다가 곧 경덕궁의 호위장이 되었다. 이듬해 인조반정 때 군사를 모아 궐문을 지켰다. 이 공으로 보성군수가 되어 학문을 진작시켰다. 또한 미납되어 온 4,000여 석의 세미(稅米)에대해 감사에게 진정해 2,800석을 감면받아 군민들의 칭송을 받았다.1624(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 본도중군을 겸하고 정예병을 모아 왕의 수레를 호위했다. 1625년 토호들의 부정한 청탁을 거절해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호위별장으로 차송되었다. 1627년 청나라의 침략 낌새가 보이자 본도호소사 (本道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중군이되었다가 별장이 되었다. 영장제가 설치되자 진주영장 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했다. 다시 상주영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괴산군수에 임명되어소를 올려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부임하였다. 1629년 경주 영장이 되어 3년 간 재직했다. 정조 때 편찬된 『충렬록(忠烈錄)』에 기록되었다. 또한순조 때 만들어진 『존주록(尊周錄)』에도 기록되었다. 청송의 덕봉사(德峯祠)에배향되었다.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에 동계정(東溪亭)이 있다.
이 문집은 생전에창석(蒼石) 이준(李埈),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등과 주고받은 시 몇 권을, 1812년에 5세손 조윤창(趙胤昌), 조응창(趙應昌)이 모은 것이다. 그러나당시에는 간행 하지 못하였고, 그 뒤 7세손 조기서(趙基緖), 조기평(趙基平) 등이 더 많은 원고를 모아서 간행하였다. 거기에는 조형도가 주고받은편지와 상소, 조지(朝旨)가있고, 신즙(申楫)이지은 묘지(墓誌)와 후손 집안에 있던 만시(挽詩), 방손 조기영(趙基永)이 모은 유사(遺事), 이병하(李秉夏)가 지은 행장이 실려 있다. 그리고 류치명(柳致明)에게서문을 받고 조기록(趙基祿)의 발문을 실어 목판으로 문집을간행하였다. 1989년에 동계집국역편집위원회에서 국역서를 간행한 바 있다. 본집은 목록(目錄), 원집(原集) 5권, 합3책으로 되어 있다. 책머리에 류치명 의 서와 전체 목록이 실려 있다. 권1∼3은 1편의 부(賦)와 443편의 시(詩)이다.
「추야제북두부」(秋夜祭北斗賦)는 촉한(蜀漢)의 부흥을 위해 자신의 목숨이 조금 더 연장되기 를 북두칠성에기원하는 제갈량(諸葛亮)의 절절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내용이다. 시는 신지제(申之悌), 오여벌(吳汝橃), 박력(朴櫟), 신여섭(申汝涉) 등에게 보낸 것, 소유정(小有亭), 하한정(夏寒亭), 쌍계정(雙溪亭), 망운정(望雲亭) 등에서 심경을 읊은 것 등과 북쪽 오랑캐에 대해 분격(憤激)한 마음에 지은 것 등이다. 권4는 소(疏), 서(書), 서(序), 기(記, 제문(祭文), 행장(行狀)이다. 「사괴산군수소」(辭槐山郡守疏)는 과분하게 괴산 군수직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임명해 달라는 내용이다. 11편의 편지는 시국에 관한 것과 안부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서와기는 망운정과 화연당(和燕堂), 오선동(五仙洞)과 풍수당(風樹堂)에 대한 감회를 적은 내용이다. 제문은 장인 오운(吳澐), 민추(閔樞), 매제 신지제(申之悌),김종효(金宗孝), 이준성(李俊成), 권익(權翊), 조부모 개장, 숙부조식(趙埴), 다섯째 아들 조함연(趙咸衍)에 대한 것이고, 행장은오운에 대한 것이다. 권5는 부록으로 전식(全湜) 등이 지은 만사(輓詞) 57편과, 1845년에 이병하가 지은 행장, 신즙(申楫)의 묘지명, 방손 조기영의 유사, 류치호가 지은 「덕봉사봉안문」(德峯祠奉安文), 홍양호(洪良浩)가 지은「십삼충록서」(十三忠錄序)이다. 책 끝에 이종상(李鍾祥)과 7세손 조기록(趙基祿)이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